관리자 2025/06/26
연경당 진작례의 추억
역사의 현장인 연경당(演慶堂)과 인연을 맺은 지도 15년이 지났다. 흘러간 세월을 따라 나도 이제 효명 세자의 지극한 효심을 그윽한 눈길로 굽어보던 순조와 순원 왕후의 따스한 마음을 느낄 나이가 되었다.
오늘 1828년 무자년 당시의 창덕궁으로 되돌아가 여섯 번째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을 올렸다. 이 복원공연은 지난 2003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부설 세계민족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사업을 수행하던 중에 성무경, 이의강 두 연구원의 제안으로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이라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을 찾아내며 시작되었다.
그 무렵에 연경당은 일반 관람객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복원 공연을 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역사의 현장인 유형문화재는 사람의 숨결이 있어야만 숨 쉬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며 간곡히 호소하여 복원공연 심의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2006년 1월에 복원공연을 승인받았다.
순조 무자년 진작례(進爵禮)는 연경당에서 펼쳐진 역사적 의례이자 또한 음악, 노래, 춤, 음식, 복식 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나는 연경당 진작례가 1828년 음력 6월 1일 진시에 열렸던 것에 맞추어 2006년 6월 26일[음력 6월 1일]에 첫 번째 복원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이후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 공연을 더 펼쳤다. 이런 과정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이런저런 사건도 있었다.
2007년 두 번째 복원공연 때는 무거운 가체를 쓴 출연자가 무더위에 견디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미국 영사부부가 초대되어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영사의 부인이 급히 심폐소생술을 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처럼 나와 연경당은 보이지 않는 가호와 성원 덕분에 지금껏 인연을 맺어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연경당 진작례는 우리나라의 궁중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나는 연경당 진작례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이것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파리를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 2010년 11월에는 우리나라에서 G20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이는 세계 정상들에게 우리나라의 궁중 의례, 춤, 복식, 연회음식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외국 정상들 앞에서 진작례를 올리는 방안을 외무부에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지난해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세계민족무용연구소의 개소 20주년을 맞이하여 제5차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을 가졌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연경당은 변함없이 고즈넉했고 왠지 알 수 없는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듯하였다. 마치 “왜 이제야 다시 찾아왔느냐”며 나를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복원공연은 지속되어야 한다! 반드시 후세에 전해야한다!! 국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신념을 되새겼다. 날개를 움츠린 새가 더 멀리 날아가듯 10년의 세월을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온 나는 연경당과의 재회를 소중하게 마음에 새기며 여섯 번째 복원 공연을 준비했다.
지난 15년에 걸친 연경당과의 인연을 돌아보면 ‘비’가 늘 곁에 있었던 듯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첫 번째 복원공연 때는 갑자기 쏟아진 폭우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공연 개최 여부를 놓고 몹시 고민하다 끝내 공연을 강행했다. 그런데 무대 위를 덮은 천막에 빗물이 고이더니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급한 나머지 천막에 구멍을 뚫어 빗물을 빼며 공연을 어렵게 마쳤다.
비와의 악연은 작년인 2019년 복원공연에서도 있었다. 행사 당일에 역대급 태풍 링링이 상륙한 것이었다. 나는 이른 새벽에 공연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연경당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하늘은 이런 나의 소망을 끝내 외면하는 듯했다. 나는 연경당 마당가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무용원 이론과 재학생 이교영은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오기도 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던가에 대해 나를 객관화하여 볼 수 있었다.
나는 야외 공연을 하기에 날씨가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잘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졌다. 이런 간절함이 전해진 것이었을까, 본 공연이 시작되는 11시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환하게 개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전에 예정된 공연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그날 내린 비는 마치 하늘이 “왜 10년 동안이나 복원공연을 하지 않았느냐”며 나를 꾸짖고, 아울러 “맑은 하늘을 보여줄 터니 앞으로 잘 해보라”며 나와 우리 연구소를 응원하고 축복하는 듯 했다.
이번 복원공연 포스터에는 한국무용사의 증인인 고 김천흥(⾦千興) 선생님의 모습을 담았다. 김천흥 선생님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인연은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은영 선생이 선생님을 초빙하여 1998년 2학기부터 2007년 작고할 때까지, 인생의 마지막 10년 동안을 무용원 이론과 학생들과 함께 하셨다. 선생님은 〈궁중정재〉, 〈한국무용학원전강독〉, 〈동양무보법연구〉 등의 강의를 통해 우리 무용사를 증언하였고, 이것은 학생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선생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잊지 않고자 이번 복원공연 포스터에 선생님의 생전 모습을 담아보았다. 선생님께서도 이 복원공연을 따뜻한 미소 속에 지켜보시리라 믿는다.
나는 세계민족무용연구소를 이끌어 《순조무자진작의궤》와 《정재무도홀기》 등 관련 문헌자료를 국역하고, 이를 바탕으로 순조 무자년 진작례라는 궁중 연향과 정재를 충실하게 복원하기 위해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15년에 걸쳐 복원공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님, 무용원 원장님, 총연출을 맡은 허동성 선생을 비롯하여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현장을 찾아주신 내외빈과 여러 관객께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앞으로도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궁중문화 콘텐츠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효명 세자, 연경당에 다시 태어나다
2019년에 세계민족무용연구소 개소 20주년을 맞이하여 의미 있는 기념행사를 기획하던 무렵의 일이다. 학교에서 〈동양무용사〉 강의를 하던 중에 2007년에 KBS에서 방영한 연경당 관련 영상을 보여주다 문득 재정적 사정으로 그동안 포기했던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을 연구소 20주년을 맞이하여 무리를 해서라도 꼭 한번 다시 재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나는 세계민족무용연구소를 이끌어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을 진행하며 모두 23개의 궁중정재를 살려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연경당 진작례 복원에 대해 모종의 사명감 내지 운명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복원공연을 재개하려면 무엇보다도 소요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맙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전미숙 원장과 총무과의 신종필 과장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고, 또 이런저런 사정을 전해들은 김봉렬 총장께서도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에 마침내 C국장의 배려로 예산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복원공연을 다시 열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자이기도 한 C국장은 이 복원공연이 효명 세자의 예술혼과 정치적 꿈이 담긴 역사적 의례라는 사실을 탁월한 안목으로 파악하고 직접 예산을 살펴주어 이 역사의 보물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C국장의 노력 덕분에 나는 10년 만에 복원공연에 필요한 영지(影池)와 대모반(玳瑁盤) 등을 고증하여 주문 제작하였고, 또 세월이 흐르며 빛이 바랜 의상을 다시 만들어 복원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게 되었다. 세계민족무용연구소 25주년에는 효명 세자의 영정을 찾아내어 이용주 선생이 복원한 의상을 입은 익종(翼宗)이 하늘에서 소풍 나와 주관하는 진작례를 보게 될 것이다.
[C국장님! 국장님이 다시 살려낸 연경당 진작례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큰일 하셨습니다.]
2020년. 모든 준비를 마치고 10년 만에 다시 연경당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교롭게 때맞춰 북상한 태풍이 나를 힘들게 했다. 복원공연 당일에는 새벽부터 폭풍이 몰고 온 강풍과 폭우가 그칠 줄을 몰랐다. 어렵게 준비한 공연을 한 차례만 하고 말기 아쉬워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복원공연을 준비했지만 무심하게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늘을 원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터라 오전 공연 채비를 마친 모든 출연진과 스태프는 비옷을 입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내빈과 관객들에게 ‘여기까지 오셨으니 비가 그치지 않으면 공연을 하기는 곤란하니 국왕 내외를 비롯한 출연진과 기념 촬영이라도 하고 가세요’라 말했다. 11시가 가까워질 무렵,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보냈다. 관객들마저 내게 ‘참 신기하고 대단하네요’라며 덕담을 건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1시 공연이 끝나자 하늘이 다시 흐려지더니 이내 비가 쏟아졌다.
진작례 복원공연이 재개되던 첫 해에는 때마침 태풍 링링이 북상하여 악천후였지만 신기하게도 복원 행사가 열리는 시간 동안은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여서 진작례를 무난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아도 그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효명 세자는 진작례를 열었던 이 무렵에 대리청정을 맡고 있었는데, 《순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이 무렵에는 자연재해가 잇달아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7년에는 18개 면(面)이 홍수에 휩쓸려 민가 1,931호가 무너지고, 20여 고을에 서 사망자가 26명이나 되었고, 1828년 7-8월에는 공주 등지에서 민가 649호가 파손되고 85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창덕궁에서 연회를 열었던 것은 부모에 대한 효성을 내세워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어려운 정국을 타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함께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본다.
나는 문득 효명 세자가 자신이 연경당에서 못다 이룩한 꿈을 마저 이어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먼 곳에서 우리를 보이지 않게 도와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경당의 문(門)
‘연경당(演慶堂)’이라는 이름은 ‘경사스러움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이다. 연경당은 궁궐 안에 있는 120칸 중에 유일하게 단청이 없는 사대부 집의 형식을 지녔다. 이곳으로 들어가려면 바깥 행랑채 앞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돌다리 아래를 흘러가는 실개울은 이른바 ‘명당수’의 개념에 따라 만든 물길이다.
연경당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먼저 연경당의 대문은 장락문(⻑樂門)이다. 연경당으로 들어가려면 대문 앞에 장대석(⻑臺石)으로 쌓은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궁집이나 사대부집 또는 사찰에 들어가며 시내를 건너는 것은 험한 속세에서 평안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장락문의 ‘장락’은 글자 그대로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솟을대문으로 만들어진 장양문(⻑陽門)이 있다. ‘장양’은 ‘오랫동안 볕이 든다’는 뜻으로, 양(陽)‘의 공간, 곧 남성의 공간을 의미한다. 장양문의 왼쪽은 여성의 공간인 안채로 들어가는 수인문(脩仁門)이 있다. ‘수인’은 ‘인(仁)을 닦는다’는 뜻이다.
정추문(正秋門)은 연경당의 안채와 사랑채를 이어주는 일각대문(一角大門)이다. 정추는 ‘한창 무르익은 가을’이라는 뜻으로, 곧 ‘중추(中秋)’와 같은 말이다. 일각대문은 마당과 마당을 나누는 담장에 설치한다.
태정문(兌正門)은 연경당 안채의 서쪽 중문으로, 태정은 ‘곧고 바르다’는 뜻이다. 연경당의 뒷문인 태일문(太一門)은 농수정(濃繡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에 있는 일각대문으로, ‘태일’은 도가(道家)에서 ‘우주의 본체’를 일컫는 말이다. 통벽문(通碧門)은 연경당 안채의 뒷편에 있는 반빗간으로 가는 문이다. ‘통벽’은 ‘푸른 곳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소양문(韶陽門)은 사랑채의 동문으로, ‘밝고 아름다운 봄빛’이라는 뜻이다. 소휴문(韶休門)은 연경당 동쪽에 있는 농수정의 동쪽 문으로, 연경당 깊숙한 곳에서 녹음에 둘러싸여 ‘짙은 초록빛을 수놓는다’는 뜻이다.
연경당에 있는 많은 문이 지닌 의미를 하나하나 새기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진작례가 열린 1828년의 연경당으로 돌아가 경사스러운 그 순간의 역사 앞에 서게 될 것만 같다.
* 이 글은 2020년 11월 11일에 열린 〈조선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 프로그램북에 수록한 글이다.